20년 SaaS의 전성기, 꿈이었을까
영화 인셉션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꿈이 현실을 대체하는 순간이 아니라, 꿈이 "현실의 규칙"을 가져버리는 순간입니다. 시간은 늘어나고, 법칙은 변형되며, 무엇보다 그 세계는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주인공들은 꿈인 줄 알면서도 그 규칙을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 안에서는 그것이 유일하게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꿈의 규칙을 현실로 착각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꿈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그것은 현실보다 더 강력한 진실이 됩니다.
지난 20년간 SaaS 투자는 그런 세계였습니다. 우리는 SaaS를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했지만, 실제로 거래한 것은 시간과 멀티플이 맞물린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조가 너무 오래 작동해서, 우리는 이것이 규칙이라고 믿었습니다. "성장하면 언젠가 보상받는다", "시간이 지나면 고객은 더 붙고 마진은 개선된다", "멀티플은 결국 회복된다" — 이런 믿음들은 반복적으로 입증되며 의심받지 않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시장의 반응은 다른 신호를 보냅니다. 무언가 펀더멘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 말입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버블 리스크’가 아니라 ‘디스럽션 리스크’이다
존 그레이, 블랙스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장은 고성장 기업을 원하지만, 상장 SaaS 기업들의 성장률은 수년간 부진했습니다. 지난 10년간 상장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평균 후행 12개월 매출 성장률을 보면, 작년 평균 성장률은 전년 대비 16%로 10년 만에 최저 수준입니다. 투자자들은 앤트로픽이나 커서처럼 AI 네이티브 기업들이 단 2 - 3년만에 매출이 0에서 수 조원에 달하는 사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장 SaaS 기업들은 시장의 기대 충족은 커녕, AI 시대에 존립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주가는 그 비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공식: 시간이 가치를 만들었던 세계
SaaS 투자에서 ‘멀티플 아비트라지 전략’은 두 개의 평행한 경로로 작동했습니다. VC는 초기 단계 낮은 매출에서 시작해 높은 성장 스토리를 구축하며 IPO나 대형 M&A로 회수하는 경로를 탔습니다. PE는 성숙한 SaaS 기업의 비용 구조를 개선하고 레버리지를 활용해 안정적 현금흐름에 프리미엄을 부여받는 경로를 탔습니다. 둘 다 “미래의 높은 멀티플”로 이동하는 게임이었지만, VC는 성장을 통해, PE는 마진과 구조를 통해 그 미래를 설명했습니다. 이 두 경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엔진을 활용했습니다. 시간 프리미엄이라는 엔진 말입니다.
이 구조가 잘 작동했던 이유는 세 가지 전제에 기반했습니다.
첫째, 고객 도입과 프로세스 정착에 시간이 걸렸고, 경쟁자가 따라잡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 지연은 SaaS 기업에게 일종의 해자로 기능했습니다.
둘째, 반복 매출 구조가 미래 현금흐름의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셋째, 자본 비용이 낮게 유지되면서 "시간이 지나면 고객이 더 붙고, 제품이 성숙하며, 마진이 개선될 것"이라는 서사에 베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서사는 실제로 상당 기간 들어맞았습니다.
2010년대 내내 상장 SaaS는 거의 10년간 30 - 40% 성장했고, 2021년 제로금리 시기 정점에서는 매출 대비 시가총액의 멀티플이 15 - 30배를 넘나들었죠. 사모 시장은 더욱 높은 프리미엄을 제공해왔고, 이 격차가 아비트라지의 여지를 만들었습니다. “대규모 매출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가정이 분기마다 반복적으로 입증되며 규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멀티플은 가격이 아니라 신념이 되었습니다. 신념은 반복되면 규칙이 되고, 규칙은 의심을 잃습니다. VC와 PE의 차이는 접근법의 차이였지, 수익 창출의 엔진은 공통적이었습니다. 둘 다 오늘의 가격과 내일의 가격 차이를 구조적으로 포획하는 게임에 올라타 있었습니다. 이 구조에서 시간은 투자자의 편이었습니다.
AI 시대의 현실: 시간이 불확실성을 키우는 세계
그런데 이제는 다릅니다. 제로금리 시대가 끝나고 금리가 오르며 수요가 둔화했고, 매출 성장률은 떨어졌습니다. AI가 구원투수로 등장해 성장률을 되살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에 베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BVP Nasdaq Emerging Cloud Index를 보면, 상장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평균 매출 멀티플은 약 6.1배, 평균 성장률은 19.3% 수준입니다. “성장률 20% 내외의 상장 SaaS는 6배 멀티플”이라는 현실이 주식시장의 새로운 기준으로 굳어졌습니다.
비상장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BVP의 Cloud 100 Benchmarks Report(2025)에 따르면, 프라이빗 클라우드 상위 기업들의 평균 매출 멀티플은 20배 수준까지 내려왔고, 이는 2021년 대비 상당한 하락입니다. 프라이빗과 상장 시장 사이의 멀티플 격차가 줄어들면서, 그 사이에 존재했던 시간차 거래의 여지가 빠르게 좁아지고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안정적 현금흐름 자산”이라는 가정 자체가 흔들린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반복 매출 구조가 곧 예측 가능성을 의미했습니다. 고객이 한번 도입하면 전환 비용이 높아 쉽게 떠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업그레이드하며 매출이 확대된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AI의 등장은 이 가정에 균열을 만듭니다. 앤트로픽의 플러그인과 Cowork, 오픈AI의 Frontier 발표는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으로 시장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IT 예산은 소비 기반 모델로 재편되고 있고, 좌석 기반 가격 책정은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행동에 나선 곳들도 있습니다. 아폴로 글로벌은 2025년 사모 대출 펀드의 소프트웨어 익스포저를 연초 20%에서 절반 수준으로 축소했고, 여러 대형 대출기관들은 일부 소프트웨어 기업 대출의 밸류에이션을 대폭 인하했습니다. 크로노스넷(KronosNet)과 파운데버(Foundever) 같은 아웃소싱 기업들의 부채는 정크본드 수준으로 거래되고 있으며, 맥아피(McAfee)와 같은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채권 가격은 급락했습니다.
“안정 자산”이라는 가정이 흔들릴 때, 레버리지는 수익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취약성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됩니다. 이것이 소프트웨어를 둘러싼 ‘멀티플 아비트라지’ 세계의 붕괴가 단순한 밸류에이션 조정이 아니라 구조적 재편이 되는 이유입니다.
VC와 PE의 동시 붕괴: 같은 엔진, 다른 증상
VC와 PE가 직면한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근본 원인은 같습니다. 둘 다 시간 프리미엄에 의존했고, 그 시간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VC의 딜레마는 비상장-상장 시장 멀티플 격차의 축소에서 시작됩니다. 과거 VC 모델은 초기 낮은 밸류에이션으로 진입해, 기업이 성장하며 프라이빗 시장에서 멀티플이 확장되고, 최종적으로 IPO나 전략적 M&A에서 더 높은 멀티플로 회수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상장 시장의 멀티플이 20배 수준까지 내려오고, 주식시장은 6배 내외에서 거래되며, 그 사이의 격차가 과거보다 훨씬 좁아졌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성장”에 대한 해석의 변화입니다. 같은 연 50% 성장이라도, 그 성장이 기존 고객 확장(NDR 120%+)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신규 고객 확보 비용을 계속 태워서 만드는지에 따라 멀티플이 달라집니다.
PE의 딜레마는 더 근본적입니다. 블랙스톤의 수장 존 그레이는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 “모두가 버블 리스크에 집중하고 있지만, 진짜 위험은 디스럽션 리스크입니다. 1990년대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옐로우페이지에 일어난 일처럼, 산업이 하룻밤에 바뀔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가 문제입니다.”
인터넷 이전 옐로우페이지는 완벽한 안정 자산이었습니다. 예측 가능한 광고 매출, 높은 갱신율, 지역 독점. 그런데 하룻밤에 무의미해졌습니다. 가격이 너무 높아서가 아닌, 그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PE가 지난 10년간 소프트웨어에 베팅한 논리는 그때와 닮아 있습니다. 2015년부터 2025년까지 1,900개 이상의 소프트웨어 기업이 4,400억 달러 규모로 PE에 인수되었습니다. 모델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반복 매출은 끈끈하고, 구독료 모델은 예측 가능한 현금흐름을 의미했죠.
그런데 이제는 PE가 소프트웨어 섹터를 선호했던 이유가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추앙받던 자산 경량 (Asset-lite) 모델은 채무 불이행 상황에서 압류할 물리적 자산이 거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가치가 폭락하는데 사모 대출 시장의 큰손인 블루아울 (Blue Owl)의 주가가 동반 하락하는 이유입니다. 과거 PE가 “완벽한 레버리지 대상”으로 여겼던 구독 기반 반복 매출이 지금은 손실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 두 딜레마의 공통 요소는 명확합니다. 과거에는 시간이 가치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AI로 가속화된 세상이 오히려 시간가치의 불확실성을 키웁니다. 결국 VC와 PE 모두 같은 엔진의 서로 다른 부분이 고장난 것입니다. 그 엔진의 이름은 시간 프리미엄입니다.
AI는 시간을 압축합니다
“AI가 SaaS를 죽인다”는 말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AI가 바꾸는 것은 소프트웨어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수명과 가치가 반영되는 속도입니다. AI는 파괴자라기보다 시간 압축기입니다.
SaaS의 멀티플 아비트라지는 본질적으로 시간을 사는 게임이었습니다. 고객은 도입에 시간이 걸렸고, 프로세스 정착에도 시간이 필요했으며, 경쟁자가 따라잡는 데도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 지연이 SaaS 기업에게는 해자로 작동했고, 투자자에게는 시간 프리미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AI는 이 지연을 줄입니다. 기능은 빠르게 복제되고, 워크플로우는 에이전트로 재구성되며, 고객의 기대치는 급격히 상승합니다. 기술의 반감기가 짧아지면, 시장은 미래 현금흐름에 더 큰 할인율을 적용합니다. 이것이 시간 프리미엄의 제거입니다.
지난 20년간 SaaS는 “시간이 해결한다”는 서사를 가졌습니다. 이 서사는 실제로 상당 기간 들어맞았고, 어느 순간 SaaS 기업을 EBITDA가 아닌, 매출의 배수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죠. 서사는 규칙처럼 굳어지고, 규칙은 의심을 거두게 만들었습니다.
2026년 2월 초의 SaaS 기업 주가 폭락은,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시대의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AI는 소프트웨어를 지우는 기술이 아니라 유효 기간을 짧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주식시장은 더이상 저성장 소프트웨어에 과거와 같은 프리미엄을 주지 않을 것이며, 비상장 시장도 AI 기업이 아니라면 펀딩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0년의 인셉션이 끝나는 시그널, SaaS 아포칼립스의 진짜 의미입니다.







